[칼럼] 판소리는 촛불집회다!
오영은 기자 bodo@wbci.kr
2019년 06월 10일(월) 10:51
판소리는 특정한 놀이나 행위가 벌어지는 공간을 의미하는 ‘판’에서 인간의 가장 심층에서 울리는 본연의 외침과 민중의 수많은 희노애락 사연을 ‘소리’로써 나타낸다. 또한 소리꾼과 청중의 적극적 참여로 완성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소리’를 이 시대의 ‘촛불집회’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적어도 조선 후기에 불려진 판소리와 촛불집회는 같다고 생각한다. 판소리와 촛불집회의 유사점 몇 가지를 들면 아래와 같다.
첫째, 겉모습이 닮았다. 민중들이 모인 판에서 창자(唱者)가 창(노래)과 아니리(말)를 하고 고수(鼓手)가 북을 두드리면 많은 청중이 추임새를 넣는 것은 판소리의 전통적 모습이다.
이는 군중이 모인 넓은 광장에서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 부패 정권을 비판하고 옆에서 북을 치면 다같이 ‘정권 퇴진!’이라 외치는 오늘날 촛불집회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리고 판소리는 ‘노래’를, 촛불집회는 ‘촛불’을 앞세운 것은 비폭력 추구의 동일 모습이다.
둘째, 속 내용이 닮았다. 판소리와 촛불집회 모두 저항의 내용들로 이루어졌다. 가장 예술성 높다는 <춘향가>를 비롯한 많은 판소리 작품에서 사회 약자인 일반 민중들이 권력자에 느꼈던 감정,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태호 이사장((사)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순천협회)은 판소리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록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다. 그는 “판소리가 저항의 소리임은 틀림없는데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저항성이 70%, 예술성이 30%”라고 말한다.
셋째, 성질도 닮았다. 판소리와 촛불집회는 난세(亂世)를 만날수록 더욱 불타오른다.
실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삼정의 문란(三政─紊亂)과 탐관오리(貪官汚吏)로 대표되는 순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시기에 명창 반열에 오른 이가 70~80명 될 정도로 조선 후기 판소리는 활황기를 맞았다. 이러한 판소리가 부흥한다는 것은 민중의식의 성장을 의미한다. 또한 시대의식이 높아진 민중은 혁명의 주체가 된다.
조선 후기 판소리를 전성기로 이끈 이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동리 신재효이다. 그는 판소리가 널리 불려질 수 있도록 각종 행정지원을 하였다. 또한 판소리 사설 개작을 통해 양반에게도 소비층으로의 참여 명분을 줌으로써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창자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간 명창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들 명창 중 조선 후기 팔명창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민중의 시대의식을 높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조선 후기 고창은 지역민들의 참여 속에 촛불집회 전신이라 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를 선언한 무장기포지가 되었다. 전라도 지역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초기 활동 무대를 제공하였다.
위와 같은 전반적 내용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 ‘판소리’는 ‘촛불집회’라 할 수 있다. 또한 판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던 고창의 ‘동리정사’은 촛불집회 중심지인 ‘광화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있고 촛불혁명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를 더욱 발전시켜 고창이 의향(義鄕)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전민중 문화예술과 문화시설팀장
오영은 기자 bodo@wbc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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